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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정리/현대 산문

(요점 정리) 풍란 - 이병기

by 세모답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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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 - 이병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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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風蘭)

- 이병기(李秉岐)

 

나는 난()을 기른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고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에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난초는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봐야 경험에서 얻는 묘한 이치와 요령을 깨닫게 된다.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桂洞)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讀書), 작시(作詩)도 하고, 고서(古書)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써 난을 길렀던

책도 읽고, 시도 짓고, 옛날 서적도 사 들이고, 그러는 틈틈이 난초를 길렀다는 의미. 작자의 고결한 선비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境地)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 해 여산(礪山)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광복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 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건란(建蘭)과 춘란(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 하던 것이, 625 전쟁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 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枯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재(養士齋)에 있으매, 소공(素空)이 건란 한 분()을 주었고, 고경선(高敬善)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 웅란(雄蘭)자란(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岸曙)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곽란(霍亂)이 났다. 5, 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달여 먹고 나았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 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었다. 방렬청상(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玲瓏)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淸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초장은 풍란의 잎과 뿌리를, 중장은 풍란의 속성과 꽃을, 종장은 풍란의 성질과 향기를 노래하고 있다.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烟)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이며 그 향(),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비록 난이 숲 속에 숨겨져 있더라도 높고 조촐한 난의 품과 향기로 인해 높은 인격자는 그것을 안다는 뜻으로 난초와의 친화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작자의 마음 자세를 시사하고 있다.

 

완당(阮堂) 선생이 한묵연(翰墨緣)이 있다듯이 나는 난연(蘭緣)이 있고 난복(蘭福)이 있다. 당귀자계수 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백중(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귀(珍貴)하다.

간죽향수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 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그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고서(古書)도 없고, ()도 없이 되잖은 서화(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을 두었다면 삼공(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

작자는 고서, , 술을 삼공(三公)에 비견하고 있다. 이 세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삼정승에 비할 바 없이 만족스러운 경지를 느낀다는 표현이다.

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O 갈래 : 경수필

O 성격 : 관조적. 예찬적. 체험적

O 문체 : 간결체

O 제재 : 난초

O 주제 : 난초의 청초함과 고결한 기품 예찬

O 출전 : <원광문화(圓光文化)>(1954)

O 지은이 :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 국 문학자. 호는 가람(嘉藍). 시조 부흥을 위해 헌신하였 으며, <가람 시조집>, <가람 문선> 등의 저서가 있 다.

 

O 작품 해설

작자는 난초에 대해서 인격적 친화감을 가질 정도로 오랫동안 난을 가까이해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난초라는 자연물을 통해 지은이가 드러내려는 관조의 세계는 지극히 고상하고 해맑은 성정의 세계이다. 부질없는 속물 근성을 경계하면서 높고 청아(淸雅)한 경지를 난과의 인연에서 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수필이 인격의 표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가람 이병기에게 난은 그의 정신 세계이자, 고결한 인간적 면모를 상징하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이 글은 난의 아름다움과 일반적인 생태를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특히 방향(芳香)을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을 무아 무상의 별유 세계(別有世界)라 하여 자신의 생활과 난을 돌볼 수 없었던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하여 개인사의 시련과 고통을 난의 시련과 일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작자는 난이 지닌 기품과 방렬(芳烈)한 향()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난의 속성 -비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도 나타나며, 그 기품은 마치 은은한 향을 맡는 것과 같다.- 을 말함으로써, 정신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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