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무한
-정비석
O 지문 해석
이 작품은 금강산에 올라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기행수필이다. 제시문은 금강산 명경대에 올라가기까지의 여정과 그 여정에서 마주친 금강산 계곡의 풍경, 그 풍경에 얽힌 설화 및 글쓴이의 소회 등을 담고 있다. 특히 명경대에서는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성찰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여정에 따른 견문과 감상이라는 일반적인 기행문의 틀을 뛰어넘어 자연적인 대상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금강 역사(驛舍)에 도착.
어느 외국인의 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이 멋진 양관(洋館). 외금강 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 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 정다운 호대조(好對照)의 두 건물이다. 내(內)와 외(外)를 여실히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 내금강역 도착
십삼야월(十三夜月)의 달빛 차갑게 넘실거리는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深山)의 밤이라 과시(果是)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溪澗)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신을 빼앗을 듯 소란하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長安寺)로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에 우쭐우쭐 둘러선다. 기쓰고 찾아온 바로 저 산이 아니었던가고 금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마시니, 어느덧 간장(肝臟)도 청수(淸水)에 씻기운 듯 맑아 온다. 청계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기 십 분쯤, 문득 발부리에 나타나는 단청(丹靑)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기조차 외람된 문선교(問仙橋)!
▶ 문선교 옆에 당도함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隱士)가 예까지 찾아와서 선경(仙境)이 어디냐고 목동에게 차문(借問)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조차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俗界)가 스스로 유별(有別)한 탓이었던가?
차문주가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은 속계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어지니, 이미 세진(世塵)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를 건너기로 하였다.
▶ 문선교를 지나면서 느끼는 감회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거니 눈이 떠진 것은
고단한 것에 비해서는
몸에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금강산 탐승에 대한 기대감
간밤에 볼 수 없었던 영봉들을 대면하려고 새댁같이 수
신령스러운 산봉우리
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 계곡은 어태 짙은 안개
새댁이 신랑을 대할 때의 느낌에 비유하여 금강산의 영봉을 대할 때의 설렘과 기대감을 표현함
속에서 준봉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
{ } 자연물인 산봉우리와 나무를 의인화하여 표현함
▲ 금강산 탐승 전의 산의 모습 (원경)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나무들(의인법)/나무가 높이 자라려는 것
하늘을 향하여 문실문실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곧고 길게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
비바람에 시달려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무
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 기품 있는 나무들의 모습
조반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
짧은 지팡이 앞길
삼아 탐승(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함
안개가 개어져 원근 산악이 열병식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 원근 산악의 단풍
만학천봉(萬壑千峰)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紅)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綠)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橙)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 다양한 단풍 든 산의 빛깔
복잡한 것은 색(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風趣)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 산의 모습과 풍취
산의 품평회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모두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 장안사 맞은편 산의 잣나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
을 거슬러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
한 찻집이 있다.
▲ 장안사 근처의 계곡과 찻집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방문한 곳을 기념하기 위해 도장을 찍도록 만든 책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 {부앙하여 천지에 참괴 없는 공명한 심정} 을
내금강 입구에 있는 석벽의 이름/부앙–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봄
{ } <맹자>의 ‘ 진심장’에서 인용,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심정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이르나니,
맑고 고요한 마음을 비유함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흐르는 물을 머무르게 함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곳
아무려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밑에 굽어보며 반공에 위연(威然)히 솟은 충암절벽이
우뚝 명경대
우뚝 마주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매우 맑았을 표현함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그림자
{ } 명경대에 얽힌 전설 - 죄를 지으면 죄의 그림자가 반사되어 비친다고 함.
▲ 명경대의 장관과 전설
명경! {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품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
{ } 실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기 때문임.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오히려 부족함
두려움도 없이 일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가히 놀랄만할
▲ 명경대에서의 감회
신라조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경순왕 9년에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이에 반대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함.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를 명경에 영조(映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
밝게 비춤
까?
{운상기품에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등극하실 몸에 마
태자의 개인적인 이생의 죄는 없었을 것임
의(麻衣)를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이 말하는 전생의 연일는지 모른다.}
{ } 숙명론적 세계관 - 인과응보, 업보, 마의 태자에 대한 연민
▲ 명경대에서 마의 태자에 대한 고사를 회고함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처럼 막아 서
염라대왕
는 웅자(雄姿)가 석가봉(釋迦峰), 뒤로 맹호(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이 천진봉(天眞峰)!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狹窄)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
매우 좁음
곡(進退維谷)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
▶ 황천강 계곡에 이르는 노정
몸이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을 길잡이에게 들어 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 속을 거닐고 있
그윽하고 깊숙함
음을 깨닫게 된다.
▶ 황천강 계곡의 수목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 황천강 계곡의 수목과 단풍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이요, 벽공에 외
멀고도 멈
연히 솟은 봉봉(峰峰)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 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朱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 단풍의 아름다움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 단풍에 동화된 경지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하며,
즐겨 감상함
몇십 굽이의 석계(石階)와 목잔(木棧)과 철삭(鐵索)을 답
돌계단
파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삼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 ── 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오천 척의 망군대(望軍臺) ---- 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 망군대에 오름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峰)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峰)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 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千?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 계곡에 단풍이 선혈(鮮血)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은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 망군대에서의 조망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訶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 마하연 여사 안주인의 환대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암(摩訶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로 30명은 됨 직하다. 이런 심산에 웬 승려가 그렇게도 많을까 !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靑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글 그대로다.
▶ 마하연사의 승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등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송이같이 떠돌았다.
▶ 마하연 여사의 남포등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 소리와 물 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 마하연 여사의 밤 정취
달빛에 젖으며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가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는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笞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 가는 카투사의 뒤를 네플류도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 마하연에서 독서하는 아가씨
다음 날 아침, 다시 산을 찾아 나섰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스님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 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峰)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연기와 안개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진 광풍(一陳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 가며 짜 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 날씨의 변화와 운무 속의 경치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峰)을 영송(迎送)하는 것도 가히 장관이었다.
▶ 운무에 싸인 영봉의 장관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로 내리붓는다. 만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海)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人情)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로(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지, 이렇게 만상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 비로봉 정상에 오름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외·해(內外海) 삼 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可惜)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海拔) 육천 척에 다시 신장(身長) 오 척을 가하고 오연(傲
거만한 모양
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
우두커니 멈춰 섬
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快勝) 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 비로봉 정상에서의 조망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 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자작나무는 무슨 수중(樹中)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楓霖)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 마의 태자의 무덤과 분위기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白樺)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中天)에 서럽다.
▶ 마의 태자의 애기 용마석의 고영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
마음 속
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 마의 태자에의 회고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須臾)던가!
잠깐동안
▶ 세월의 무상함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依支)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暗然)히 수수(愁愁)롭다.
▶ 인생의 무상함
O 갈래∶경수필(기행문)
O 성격∶낭만적, 회고적, 서정적, 서경적, 기교적
O 제재∶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
O 주제∶금강산의 무한한 정취
O 특징
➀ 다양한 수사법을 동원한 화려한 문체를 구사함.
➁ 주로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문장을 진술함.
O 출전∶「비석과 금강산의 대화」(1963)
O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작자의 조국 강산에 대한 깊은 애정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는 기행 수필로, 아름다운 금강산에서 느낀 감회를 서술하고 있다. 금강산 장안사로 가는 길부터 시작하여 ‘장안사 → 명경대 → 황천 계곡과 망군대 → 마하연과 비로봉 → 마의 태자의 묘지’에 이르는 여정과 감상을 노정에 따른 추보식 구성으로 쓴 글이다.
작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요, 신비로운 일화가 얽혀 있어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저절로 탄성을 울리게 하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화려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서경과 서정의 조화를 살리고, 섬세한 필치로 멋과 교양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신선한 감각과 낭만적인 정감, 회고적인 감회가 전편에 흐르고 있다.
여정의 단순한 기록이라는 기행문의 일반적 관념을 뛰어넘어 서정시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를 느끼게 하며, 기행 수필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O‘산정 무한’의 표현상의 특징
▪ 서경(敍景)과 서정(抒情)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감각적이고 섬세한 언어와 다양한 표현 기교를 구사 하여 화려체의 묘미를 느끼게 해 주지만, 한편 현란한 느낌도 준다.
▪ 자연이 엮어 내는 장관에 대한 감탄, 지명에 얽혀 있 는 일화와 전설에 대한 회고, 나그네로서의 객창감 등 으로 이루어져 있다.
▪ 여정에 따른 견문과 감상으로 구성되어 기행문의 요 소를 갖추고 있다.
O 기행문의 요소
▪ 여정(旅程)∶언제, 어디를 거쳐 어디로 여행했는가를 밝히는 요소로서 사실적인 여행의 기록이다.
▪ 견문(見聞)∶여행 중에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 으로서, 기행문을 읽는 독자에게 간접 체험의 기회를 준다.
▪ 감상(感想)∶견문에 대한 작자의 생각이나 느낌을 밝 힌 것으로, 수필이 지니는 특징인 작자의 가치관이 드 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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